고전 9장은 사도바울의 사도직에 대한 권리 포기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처럼, 먹고 마실 권리
다른 사도나 형제처럼,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
쉴 권리
정당한 소유의 권리, 수확의 권리 등이 있음을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그는 참고 그리스도의 복음에 장애가 없도록 하기 위해 그 모든 권리를 자제하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12)
내가 복음을 위해 살지라도 내가 자랑할 것이없고, 그것은 나의 사명이라고 이야기합니다. (16).
우리는 우리의 삶을 먼저 생각해 봅시다. 우리 인생의 삶의 소명이 무엇인지요? 우리는 쉽게 복음을 우리 삶을 통해서 드러내는 것이라고 이야기 하곤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복음전파와 이 세상을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회복시키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복음을 위해 우리가 가진 권리, 행복할 권리, 소유할 권리 등을 얼마나 사도바울 처럼 절제하고 복음이 우선되는 삶을 살고 있는지 각자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재물과 시간의 권리들을 얼마나 복음의 우선적으로 두고 있는가?
복음 전함을 우리의 소명으로 정말 생각하고 있는가 물어본다면, 우리는 그 답을 우리 삶의 우선순위와 우리의 권리들을 얼마나 포기하고 절제하고 있는가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녀들이 행복하길 소망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녀들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재능을 잘 개발해서 그들의 삶이 보람되길 소망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포기하고 절제하라고 가르치진 않습니다.
우리 자녀들에게 자신들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을 복음을 위해서 포기하라고 가르치진 않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라고 어렸을 때부터 가르치진 않습니다.
때로는 선교사가 목사가, 신학교에 가겠다고 말할 까봐 조금 걱정입니다.
좋은 대학가서 좋은 직장잡아서 어느 정도 권리를 가지고 살면서 적당히, 또는 조금 넉넉히 다른 사람들 보기에도 좋고, 폼나게 신앙생활하길 소망합니다.
사도바울 처럼, 자신의 상을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 라는 고백으로 아무런 권리를 누리지 못하고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살길 바라는 부모들이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우리 자녀들에게 리더가 되라고 격려하고 배우라 하지, 종이 되라고 가르치진 않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19) 고백합니다.
우리는 썩어질 승리관을 위해 달리라고 우리 아이들을 훈련시키고 힘들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썩지 않을 승리의 관을 위해 절제하고 자신의 몸을 쳐 복종하게 한다고 고백합니다. 목적이 없고, 참된 유익이 없는 것을 위해 애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에 가장 귀한 복음의 일을 위해서 이기기를 위해 모든 일에 절제하는 것을 우리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포기하고 절제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자신의 것을 남을 위해, 복음을 위해, 하나님 나라를 위해 포기하고 절제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자신의 정당한 권리, 세상사람들이 누리고 있는 그 권리를 영원한 관점에서 포기하고 절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른 친구를 위해 양보할 줄 아는 사람,
자신의 권리를 기꺼이 희생할 줄 아는 사람,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 자신의 권리를 포기할 수 있는 사람,
영원한 관점에서 모든 일에 절제하고 권리를 사용하지 않고,
오직 복음을 위해 포기하는 것 자체가 큰 상이라는 것,
오직 복음을 전하는 삶 자체가 큰 상이라는 관점을 가지고 있는 자녀들
자신의 권리가 있으며, 자유로운 자이나 그 자유를 하나님 나라를 위해 묶고 스스로 낮아지고 순종할 줄 아는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들을 소망하며 우리 스스로 그렇게 먼저 살아가는 부모로서의 소명을 회복하는 저희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음심이라" 빌2:5-7
1 Corinthians
Monday, November 25, 2013
Sunday, November 24, 2013
Paul's love 바울의 지식을 넘어선 사랑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Knowledg puffs up, but love builds up (1 Cor 8:1b).
여기서 말하는 지식은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불리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
사도바울은 이런 지식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래서 믿음이 약한 사람들은 우상에 드린 음식을 먹게 되면 이 지식의 부족으로 인해 양심이 약해진다고 하였다. (7절) 따라서 그는 이 지식이 있어 자유함이 있으나, 믿음이 약한 자들과 지식이 없는 자들을 위해 영원히 그런 음식을 먹지 않는다고 하였다. (13절)
왜냐하면 그것은 네 지식과 행동이 믿음이 약한 자를 넘어지게 하는 데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은 형제다 (11절) 따라서 그들의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께 죄를 짓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12절)
얼마나 깊은 지혜이며, 사랑인가?
우리는 이러한 바울의 지성과 영성을 본받아야 하며, 우리 자녀와 학생들에게도 이런 상을 심어 주어 진정으로 겸손한 그리스도의 섬기는 리더로서 자랄 수 있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
지식이 교만을 부추긴다면, 그 얼마나 큰 죄인가? 하나님은 지식을 그렇게 의도하셔서 주시기 않으셨다. 지식에 사랑을 더해 그 지식이 덕을 세울 수 있도록 하는 인격을 하나님은 원하신다.
이것이 기독교학교에서 진정 바라는 상이 아닌가 싶다.
우리의 지식이 약한자를 상하게 하는 것이라면,
우리의 자유가 연약한 자를 넘어지게 하는 것이라면,
우리의 자녀와 학생들이 지식이 있는데 그것으로 덕을 세우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육을 하지 못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진정으로 지식이 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그들을 가르쳤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 주시느니라" (2,3)
영어 성경에서는 2절과 3절의 연결은 그러나 but으로 연결합니다.
안다고 하면서 사랑으로 행하지 않으면 그것은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앎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없이 알 수 있는 것은 없다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큰 앎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을 기반으로 한다는 것은 만물을 이해할 수 있는 기본을 갖춘다는 것입니다.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으니,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고 어떻게 무엇을 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자연스럽게 우리는 자녀들과 학생들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그를 사랑하는 것을 훈련시켜야 하는 것이 신앙교육의 주된 목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와 지식의 근본이라는 것은 이렇게 연결됩니다. (잠언1:7;9:10).
우리는 이렇게 여호와께서 만물의 주인이시며 우리도 그를 위해 창조되었고 복받은 존재라는 것을 알게 하고, 거기에 따라 하나님께 기쁘게 순종하며, 우리의 이웃인 타인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세우는 덕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들을 키우는 것이 우리 학교의 목적인 것입니다.
바울처럼 자신의 자유와 지식을 덕을 세우는 데 사용하는 섬기는 그리스도인을 꿈꾸는 우리의 사역이 되길 기도합니다.
Knowledg puffs up, but love builds up (1 Cor 8:1b).
여기서 말하는 지식은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불리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
사도바울은 이런 지식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래서 믿음이 약한 사람들은 우상에 드린 음식을 먹게 되면 이 지식의 부족으로 인해 양심이 약해진다고 하였다. (7절) 따라서 그는 이 지식이 있어 자유함이 있으나, 믿음이 약한 자들과 지식이 없는 자들을 위해 영원히 그런 음식을 먹지 않는다고 하였다. (13절)
왜냐하면 그것은 네 지식과 행동이 믿음이 약한 자를 넘어지게 하는 데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은 형제다 (11절) 따라서 그들의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께 죄를 짓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12절)
얼마나 깊은 지혜이며, 사랑인가?
우리는 이러한 바울의 지성과 영성을 본받아야 하며, 우리 자녀와 학생들에게도 이런 상을 심어 주어 진정으로 겸손한 그리스도의 섬기는 리더로서 자랄 수 있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
지식이 교만을 부추긴다면, 그 얼마나 큰 죄인가? 하나님은 지식을 그렇게 의도하셔서 주시기 않으셨다. 지식에 사랑을 더해 그 지식이 덕을 세울 수 있도록 하는 인격을 하나님은 원하신다.
이것이 기독교학교에서 진정 바라는 상이 아닌가 싶다.
우리의 지식이 약한자를 상하게 하는 것이라면,
우리의 자유가 연약한 자를 넘어지게 하는 것이라면,
우리의 자녀와 학생들이 지식이 있는데 그것으로 덕을 세우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육을 하지 못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진정으로 지식이 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그들을 가르쳤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 주시느니라" (2,3)
영어 성경에서는 2절과 3절의 연결은 그러나 but으로 연결합니다.
안다고 하면서 사랑으로 행하지 않으면 그것은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앎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없이 알 수 있는 것은 없다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큰 앎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을 기반으로 한다는 것은 만물을 이해할 수 있는 기본을 갖춘다는 것입니다.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으니,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고 어떻게 무엇을 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자연스럽게 우리는 자녀들과 학생들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그를 사랑하는 것을 훈련시켜야 하는 것이 신앙교육의 주된 목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와 지식의 근본이라는 것은 이렇게 연결됩니다. (잠언1:7;9:10).
우리는 이렇게 여호와께서 만물의 주인이시며 우리도 그를 위해 창조되었고 복받은 존재라는 것을 알게 하고, 거기에 따라 하나님께 기쁘게 순종하며, 우리의 이웃인 타인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세우는 덕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들을 키우는 것이 우리 학교의 목적인 것입니다.
바울처럼 자신의 자유와 지식을 덕을 세우는 데 사용하는 섬기는 그리스도인을 꿈꾸는 우리의 사역이 되길 기도합니다.
Friday, November 22, 2013
Paul's confidence to his fellowers in the promise of Christ 성도들에 대한 바울의 희망과 확신에 대한 근거(긍정의 힘no,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 자체 yes)
1 Corinthians 1:1-9
고린도교인들로부터 들려 오는 좋지 못한 소식들, 그들의 성숙하지 못한 행동과 분열 등에 대해서 들으면서도 바울은 그들의 영적 성숙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을 뿐더러 그것에 대한 확신속에서 그들을 격려하는 편지를 썼습니다.
바울은 그런 모순과 비 성숙한 성품들을 보면서도 어디서 그런 희망과 확신을 가질 수 있었을 까요?
2절을 보면 우리는 바울의 그런 소망과 확신이 자신의 확신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약속과 부르심에 대한 믿음에서 인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성도들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
아직 성숙하지 못한 성품으로 교회내에서 분열과 비도덕적인 일들을 하는 그들을 바울은 확신에 차서 거룩한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자, 또한 이미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거룩하여 진자로 봅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부르는 자, 결국 그 분을 주인으로 모시고 그 분께 인생을 맡긴자로 보고 있습니다.
결국 바울이 미성숙한 성도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한 자로 보며 그것은 결국 주님의 약속과 주님때문에 그들의 성숙함을 확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의 미성숙함을 그들의 실패로 보지 않고, 그들을 사랑하시는 주님과 그들과 끝까지 함께할 주님을 보고 그들의 자라남에 대한 확신을 가지는 것입니다.
바울이 가지는 성도들에 대한 긍정성은 인간을 선하게 보고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존재, 다시 말해서 성선설이나 인본주의적 긍정적 마인드에서 나오는, 인간에 대한 무한한 신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주님의 이름에 근거해서 그는 자신이 양육하고 가르치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당신들은 이미 그리스도예수 안에서 거룩하여 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았다"라고 확신의 격려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우리 자녀들과 학생들을 그런 긍정의 눈으로 바라봅니까?
우리는 얼마나 자주 그들을 인본주의적이고 세상적인 관점으로 너는 할 수 있다고 우리도 모르게 우리 자신과 자녀자신을 무의식적으로 신뢰하는 듯한 말로 그들을 동기부여하려고 합니까?
일반 교육은 학생들의 잠재력을 무한 신뢰합니다.
좋은 말을 하면 좋은 아이가 된다며 긍정의 말을 이야기 합니다.
우리에게 선한 것이 없고, 우리는 주님안에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지만, 주님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은 성경은 수도 없이 이야기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과의 관계속에서 아이들을 보지 않고, 아이들에게 너는 할 수 있다라는 식으로 긍정의 힘을 불러 일으키려고 애씁니다.
바울은 나중에 이렇게 그리스도안에 있는 성도들에 대한 확신의 근거로서 그리스도가 참 지혜라고 이야기합니다.
참 하나님의 지혜되신 그리스도를 생명으로 가지고 있는 우리 자녀들은 생명의 길, 지혜의 길로 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그들 때문이 아니라 주님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녀들이 그 지혜의 주님, 생명의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삶을 살도록 도와야 합니다.
우리 자녀들을 주님의 보혈로 피로 이미 씻기시고, 거룩한 성도로 부른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바라보고 자녀들에 대한 확신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이름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이 거룩한 지식이 풍성해 질 것이며(5절), 그들에게 합당한 은사가 풍족할 것이며(7절),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실 것이라는(7절) 확신과 소망속에서 기쁨과 감사로 자녀들을 성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가 그들과 함께 있다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녀들이 온전히 하나님을 알고, 그리스도를 그들의 구원자와 주님으로 모시고 있는가에 첫번째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없이는 그들은 고통속에 걷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학업은 고통이며 헛된 것이 됩니다.
그들의 학업에 관심을 갖기 이전에 우리는 그들의 영혼에 관심을 갖아야 합니다. 주님의 심정으로 그들의 허무함을 채워주고, 무기력함에 참된 힘을 불어 넣어 주고, 삶의 의미를 깨우쳐 주는 것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없는 인생의 허망함에 대해 우리는 이야기해야 하며, 주님과 동행하는 삶은 이 세상의 보이는 성공을 너머선, 영원한 관점에서의 복이라는 것을 우리는 우리 자녀들이 잘 인식하고 그것에 순종하는 삶에 준비가 되어있는지 먼저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우리 아이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주와 더불어 교제하며 살아가는 삶속에 있다면, 바울의 고백처럼 하나님은 신실하시다라는 찬양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흘러 나오길 소망합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롬10장에서 처럼 우리는 먼저 우리의 자녀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며 의지할 수 있도록 그 이름의 의미와 복음을 나눠야 할 것입니다. 기도하시고, 씨를 뿌리시는 우리가 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현재 구원받은 자녀가 우리가 보기에 흡족하지 않더라도, 주님이 이미 거룩하게 하신 그들을 우리는 감사로 바라보고 그들안에서 그들을 빚어 가실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인도하심에 대한 확신속에서 격려하고 가르치고 양육하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할 것 입니다.
포기하지 마십시요.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능력을 보았을 때는 좌절 뿐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자녀들을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 데 우리 아이는 아직도 이래.. 하는 말 속에 우리의 믿음없이 있습니다.
우리와 우리 자녀를 보지 말고 그들을 사랑하시고, 용서하시고, 거룩하게 빚어가시는 하나님 아버지, 그의 아들 그리스도, 보내주신 성령하나님을 바라보시고 신실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처럼 우리 부모들이 먼저 거룩하고, 충성되고 신실하게 우리에게 맡겨주신 귀한 자녀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키우는 데 부족함이 없도록 본분을 잘 감당하는 저희들이 되도록 간구하시길 바랍니다.
고린도교인들로부터 들려 오는 좋지 못한 소식들, 그들의 성숙하지 못한 행동과 분열 등에 대해서 들으면서도 바울은 그들의 영적 성숙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을 뿐더러 그것에 대한 확신속에서 그들을 격려하는 편지를 썼습니다.
바울은 그런 모순과 비 성숙한 성품들을 보면서도 어디서 그런 희망과 확신을 가질 수 있었을 까요?
2절을 보면 우리는 바울의 그런 소망과 확신이 자신의 확신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약속과 부르심에 대한 믿음에서 인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성도들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
아직 성숙하지 못한 성품으로 교회내에서 분열과 비도덕적인 일들을 하는 그들을 바울은 확신에 차서 거룩한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자, 또한 이미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거룩하여 진자로 봅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부르는 자, 결국 그 분을 주인으로 모시고 그 분께 인생을 맡긴자로 보고 있습니다.
결국 바울이 미성숙한 성도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한 자로 보며 그것은 결국 주님의 약속과 주님때문에 그들의 성숙함을 확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의 미성숙함을 그들의 실패로 보지 않고, 그들을 사랑하시는 주님과 그들과 끝까지 함께할 주님을 보고 그들의 자라남에 대한 확신을 가지는 것입니다.
바울이 가지는 성도들에 대한 긍정성은 인간을 선하게 보고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존재, 다시 말해서 성선설이나 인본주의적 긍정적 마인드에서 나오는, 인간에 대한 무한한 신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주님의 이름에 근거해서 그는 자신이 양육하고 가르치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당신들은 이미 그리스도예수 안에서 거룩하여 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았다"라고 확신의 격려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우리 자녀들과 학생들을 그런 긍정의 눈으로 바라봅니까?
우리는 얼마나 자주 그들을 인본주의적이고 세상적인 관점으로 너는 할 수 있다고 우리도 모르게 우리 자신과 자녀자신을 무의식적으로 신뢰하는 듯한 말로 그들을 동기부여하려고 합니까?
일반 교육은 학생들의 잠재력을 무한 신뢰합니다.
좋은 말을 하면 좋은 아이가 된다며 긍정의 말을 이야기 합니다.
우리에게 선한 것이 없고, 우리는 주님안에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지만, 주님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은 성경은 수도 없이 이야기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과의 관계속에서 아이들을 보지 않고, 아이들에게 너는 할 수 있다라는 식으로 긍정의 힘을 불러 일으키려고 애씁니다.
바울은 나중에 이렇게 그리스도안에 있는 성도들에 대한 확신의 근거로서 그리스도가 참 지혜라고 이야기합니다.
참 하나님의 지혜되신 그리스도를 생명으로 가지고 있는 우리 자녀들은 생명의 길, 지혜의 길로 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그들 때문이 아니라 주님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녀들이 그 지혜의 주님, 생명의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삶을 살도록 도와야 합니다.
우리 자녀들을 주님의 보혈로 피로 이미 씻기시고, 거룩한 성도로 부른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바라보고 자녀들에 대한 확신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이름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이 거룩한 지식이 풍성해 질 것이며(5절), 그들에게 합당한 은사가 풍족할 것이며(7절),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실 것이라는(7절) 확신과 소망속에서 기쁨과 감사로 자녀들을 성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가 그들과 함께 있다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녀들이 온전히 하나님을 알고, 그리스도를 그들의 구원자와 주님으로 모시고 있는가에 첫번째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없이는 그들은 고통속에 걷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학업은 고통이며 헛된 것이 됩니다.
그들의 학업에 관심을 갖기 이전에 우리는 그들의 영혼에 관심을 갖아야 합니다. 주님의 심정으로 그들의 허무함을 채워주고, 무기력함에 참된 힘을 불어 넣어 주고, 삶의 의미를 깨우쳐 주는 것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없는 인생의 허망함에 대해 우리는 이야기해야 하며, 주님과 동행하는 삶은 이 세상의 보이는 성공을 너머선, 영원한 관점에서의 복이라는 것을 우리는 우리 자녀들이 잘 인식하고 그것에 순종하는 삶에 준비가 되어있는지 먼저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우리 아이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주와 더불어 교제하며 살아가는 삶속에 있다면, 바울의 고백처럼 하나님은 신실하시다라는 찬양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흘러 나오길 소망합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롬10장에서 처럼 우리는 먼저 우리의 자녀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며 의지할 수 있도록 그 이름의 의미와 복음을 나눠야 할 것입니다. 기도하시고, 씨를 뿌리시는 우리가 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현재 구원받은 자녀가 우리가 보기에 흡족하지 않더라도, 주님이 이미 거룩하게 하신 그들을 우리는 감사로 바라보고 그들안에서 그들을 빚어 가실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인도하심에 대한 확신속에서 격려하고 가르치고 양육하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할 것 입니다.
포기하지 마십시요.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능력을 보았을 때는 좌절 뿐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자녀들을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 데 우리 아이는 아직도 이래.. 하는 말 속에 우리의 믿음없이 있습니다.
우리와 우리 자녀를 보지 말고 그들을 사랑하시고, 용서하시고, 거룩하게 빚어가시는 하나님 아버지, 그의 아들 그리스도, 보내주신 성령하나님을 바라보시고 신실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처럼 우리 부모들이 먼저 거룩하고, 충성되고 신실하게 우리에게 맡겨주신 귀한 자녀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키우는 데 부족함이 없도록 본분을 잘 감당하는 저희들이 되도록 간구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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